제 목    .....
글쓴이    거시기 등록일    2016-11-15 조회수   65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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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위 서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건번호 제 호에 대한 경위서를 올리고자 합니다. 너무 오래되었고. 잊고 싶었던 과거이지만 다시 되새기며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저는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에서 1956년 부 : 이 진 규. 모 : 이 희 순 사이에서 6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3살이 되던 해. 일제에 의해 광부로 끌려가 일을 하시던 아버님이 규폐증으로 돌아가시고. 이어 작은 아버지도 얼마되지 않아 돌아가셨고. 제가 기억할수 없는 누나들도 당시 15~18세 하나둘 깊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었습니다. 제 나이 6살 어머니는 저와 둘째 형을 대전에 아는 집으로 보내 살게 하였는데. 가끔 찾아오시는 어머니는 형과 이야기를 하면서 형과 우시곤 하였는데 왜 우냐고 물었지만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12살 되었을 즈음 어머니는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대전으로 이사를 오셨고. 처음으로 행복이란게 이런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6살 때 헤어져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누나들 모두가 돌아가셨다는 말씀과 여동생은 아는집에 맡겼다고 들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누나들이나 동생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누이들을 영영 만날 수 없다니. 하나밖에 없는 동생마저 만나지 못하고... 6살까지 저를 업어 키웠을 누이들 생각할수록 그립고 마음이 아픔니다. 한번 피워보지도 못하고 떠나간 3명의 누이들. 우리가 얼마의 확률로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너무 가혹한 운명이라 눈물이 앞을 가리웁니다. 어릴때는 신을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습니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가혹한 운명은 만들지 않았을겁니다. 또한 정의가 죽어버린 대한민국은 또 어떻습니까. 신은 있다해도 이미 죽었습니다. 제가 죽어 신을 만난다면 정의롭지 못한 이 세상에 대하여 또한 제 누이들과 형님들의 운명에 대하여 신을 결코 용서치 않을것입니다. 제나이 13살쯤 32살 차이인 맏형이 군대를 제대하고 집에 오셨습니다. 저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아버지를 많이 닯았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성격은 너무나 괴팍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밥상이 날아가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작은 형과 싸우기도 했는데 돌로 작은 형의 머리를 때려 피를 흘리며 다치기고 했지요. 어머니를 만나 잠시잠간의 행복은 그렇게 깨어져 버렸습니다. 맏형님은 어머니가 준 적지 않은 돈을 갖고 홀연히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잠시동안의 평화가 찾아오고 작은 형이 군대를 갔습니다. 이어 월남에 가셨는데 ............... 어느 날 전사통지서를 받았습니다. 6살 때 대전으로와 저를 업어키운 부모같은 형이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그런거더군요. 형제인 저도 그런데 기둥이라 생각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는 시골에서 정리한 재산의 일부를 형님에게 떼어주고 살림이 피폐해지자 작은 형님이 월남을 자원입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와 저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지만 산 사람은 또 살아가게 되더군요. 제가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부산에서의 생활이었는데 제가 당시 일본 여자 친구를 못잊어 근무지를 부산으로 선택했습니다. 다른 꿈이 있었기에 어머니와 5년까지만 근무하기로 약속하고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었습니다. 부산의 생활은 하루하루 바쁘고 신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저 바다로 해수욕도 다니고 여기 저기 구경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생겨 어머니에게 보여드렸지만 퇴짜를 맞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결코 살수 없다는것을 알기에 헤어질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해서라도 결혼을 해 어머니를 편히 모시려 노력했지만 여인들이 어머니의 마음에 차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더군요. 남편과 모든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뜻을 저는 거역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암튼 제가 벌어 어머니를 봉양함으로 얼마나 기쁜 시간들이었는지 모릅니다. 동생을 맡긴집을 찾아갔지만 찾을수 없었고. 형님또한 여기 저기 수소문 했지만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러 부산에서의 공무원 생활을 접고 어머니와 저는 다시 대전으로 귀환했고. 저는 28세에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회란 저같은 풋내기쯤은 한방에 보내더군요. 몇 달 가지 않아 두손을 들었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의 심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던중 아이디어가 떠 올라 29세때 저는 빌린돈 2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매일 현찰을 보따리로 은행에 맡길만큼 크게 성공을 했습니다. 유성에서 저를 모르면 유성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지역 유지가 되어 여기저기 봉사도 하게되었습니다. 어머니께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데려온 아가씨는 어머니가 반대하시니 어머니 환갑도 다가오고 결혼을 해야겠으니 어머니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데려오세요...라고 말씀드렸고. 어머니 마음에 드는 아가씨라며 데려온 여인과 결혼을 하게되었습니다. 결혼.... 사랑은 없었지만 아이를 낳으면 살겠지. 사랑은 없지만 살다보면 정으로 살겠지. 하지만.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고부간의 갈등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는데 정말 미치겠더군요. 어떤때는 회사에 찾아오셔서 정문앞에서 소리소리 지르시고... 휴~~ 그 10년이 저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말수없는 아내는 결국 폭력사태를 일으키더군요. 그 과정에서도 형님은 찾았는데 힘들게 사시더군요. 한동안 형님을 돌봐드렸지만 어느 날 홀연히 나가버리셨습니다. 동생은 찾아도 찾아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폭력사건으로 딸 둘을 아이엄마에게 맡기고 이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폭행을 휘두른 아내와 살수는 없었지요. 당시 아이들이 너무 어리기에 엄마가 기르는것이 좋겠다는 판단하에 사업체고 아파트고 모두 주고 저는 입은 옷만 걸치고 무일푼으로 집을 나왔습니다. 다시 형님을 찾았는데 그때는 정신이 이상해져 있으시더군요. 중증이라 병원에 입원하셔야될 입장이어서 학하동 정신병원에 입원시켜드리고 왕래 하던중 집에 오시고 싶어하시길래 집으로 잠시 와 계셨는데 이상해서 대전 선병원에 입원했는데 불과 2일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 40대 초반였고 형님은 환갑 가까이 되었을겁니다. 그렇게 형님은 결혼도 못해보시고 한줌의 재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니는 유방암 선고를 받고 투병에 들어가십니다. 저는 약초를 공부해 병원약과 제가 드리는 약도 함께 드셨는데 상당히 호전되었고. 2014년 9월 1일 91세까지 사셨습니다. 사업도 혼자 하는것은 힘이 듭니다. 병간호도 마찬가지구요. 너무 고생스러워 때로는 원망도 했지만 생떼같은 자식을 하나둘도 아닌 5명이나 먼저 보내고 한평생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생각하면 원망이 아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저는 동생을 찾아 백방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 12월쯤 서천에서 단서를 얻어 청주에서 동생을 찾았습니다. 호적에 분명히 있는 이 정옥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단군이래 이어온 한 가문이 문을 닫아야 하는 절박함에 처해 있습니다. 아들로서 막내이지만 큰 아들의 역할을 해야하고. 아들을 두어 성씨를 이어가야하나 딸만 둘이고. 그나마 가정불화로 아이들 얼굴본지 언제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자신이 어렵다 해도 수천년 이어온 한 가문의 문을 닫아야 하는 중책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습니다. 고통의 신음을 토하며 죽기전까지 책임을 다하려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고뇌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결코 이 은혜잊지 않겠습니다. 이 진 규. 이 희 순의 자녀 이 원구와 이 정옥은 호적에 나와있듯이 분명한 남매이므로 함께 해야 함이 당연한것 아니겠습니까. 이는 저와 동생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합니다. 재판장님의 너그러우심과 보살핌이 그동안 고통으로 점철된 한 가문에 따듯한 온기가 되어주시기를 감히 청하옵니다. 2016.11.12 이 원구